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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서사를 넘어 이미지로 짠 일상의 歷史畵 등록일 : 2016-03-01    조회: 968
작성자 : 김영동(미술평론가) 첨부파일:
서사를 넘어 이미지로 짠 일상의 歷史畵
윤상천展, 수성아트피아

신라사람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열전〉 편은 다음과 같이 전하는데, “그 소나무 그루의 뻗어 올라간 품이라든지, 비늘 같은 붉은 껍질이며, 서리서리 퍼진 가지와 청정한 솔잎이 살았다. 까막까치와 솔개며 제비 ․ 참새까지 살아 있는 소나무로 알고 날아들다 벽에 부딪쳐 떨어지곤 하였다. 여러 해가 되어 빛깔이 바래하게 되매, 절에 중이 색을 덧칠하였더니 까막새가 다시는 날아들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 윤희순, 『조선미술사연구』, 범우사, 1995.)

윤상천의 소나무 그림들을 보며 문득 이 일화가 떠올랐다. 그 옛날 일이지만 얼마나 표현이 생생했기에 눈앞에 펼쳐진 실제의 광경을 방불케 했을까? 그러나 현실의 윤작가도 형형색색으로 뻗은 나무의 모습을 너무 잘 그려서 멀리서 볼 때는 사진으로 착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주변에서 ‘소나무 작가’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지 않았을까. 그런데 정작 이런 식의 칭찬이 작가를 명예롭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소나무를 잘 그리기로 이름난 작가가 여럿 더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이 실물처럼 보이게 하는 테크닉을 두고 하는 말들이라면 고대의 전설 같은 이야기에 진배없는 것이 되고 만다.

화가의 테크닉을 아무리 칭찬한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는 오늘날의 작가에겐 전혀 영예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재현을 둘러싼 서양의 일화를 한 번 더 들어보자면, 솜씨의 겨룸이 당시 세인들의 흥미를 북돋울 때인데 제욱시스라는 그리스 화가를 둘러싼 한 논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제욱시스는 포도송이를 손에 든 어린이를 그렸는데, 새들이 끌려올 만큼 그 포도가 실물과 꼭 닮아서, 이를 본 한 사람은 새가 그 그림을 비평했다고 단언했으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어린이가 실제와 꼭 닮았다면 새들이 감히 거기에 접근하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참고 : A․ 리샤르, 최민 역, 미술비평사, 열화당) 거두절미된 인용이긴 하지만, 세네카의 『논쟁』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여기서 제욱시스는 뒤에 포도를 지우고 그림의 다른 부분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이 말은 제욱시스가 추구한 것이 실물과 똑 같이 보이게 하는 테크닉이 아니란 점을 부각시킨다. 화가의 테크닉은 비평가를 포함한 당시 사람들의 주된 호기심이었지만, 작가의 의지는 다른 곳을 향했던 것이다.

내가 윤상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알았던 것은 정작 그림이 아닌 오브제 작업이었다. 세단 승용차의 전면 부를 보닛과 분리해 따로 설치해놓은 것인데 번쩍거리는 광택이 흐르는 헤드램프와 그릴의 과장된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 마치 팽창되어 부풀어 오른 듯 보이는 형상이 자본주의의 탐욕과 천박한 과시욕을 절묘하게 상징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Money’라는 글자의 번호판은 냉소적 유머를 담은 촌철살인의 풍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바로 소나무 이미지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그 다음 캔버스 대신 자동차 보닛 위에 직접 소나무를 그리는 작가였다.

아마도 윤작가는 소나무가 상징하는 정신적인 분위기와 그것과 상반되는 산업 생산물을 결합시킴으로써 두 가지 정도의 효과를 의도한 듯하다. 하나는 소나무의 모티프에 부여한 상징성을 현대문명의 이기와 화해시키고 우리 삶과 생활의 좀 더 가까운 곳으로 불러오고 싶은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동안 너무 익숙해진 것에서 벗어나 매체의 확대를 꾀하고픈 시도였으리라. 자동차의 보닛을 오브제로 그 위에 반영되며 굴절된 영상을 그리는 것까지는 그의 실험정신의 활보로 인정된다. 일종의 퍼포먼스에까지 그의 도전은 거침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나무라는 한 가지 모티프에만 메여있다는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는 없었나 보다.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몰두했던 작업들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전환을 위해 지난한 노력을 쏟았다. 용기 있는 결단은 훨씬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현대사회의 일상 속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가능했다. 매일매일 일어나는 정치, 경제, 문화 전 분야의 뉴스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소재로 새로운 역사화의 제작에 도전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 <One year>라는 신작 시리즈는 한 해 동안의 사건 사고에 대한 일종의 기록화이다. 사실적인 이미지들로 모자이크된 대형 캔버스들은 마치 피터 브뤼겔이 그린 세시 풍속화들처럼 월별로 전개되는데 계절별로 반복되는 보편적인 일상이 브뤼겔의 르네상스기 작품 유형이라면 윤작가의 월별 그림은 덧없는 사건들로 가득 채워진다.

필연성에 의해 선택된 내용은 실은 모두 우연적이며 아무도 유기적인 연관관계 상에서 일치된 해석을 내리기 힘든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하나의 묘사가 지닌 핍진성과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전달의 허무함은 피할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오직 이미지로부터 받게 될 시각상의 충격일 것이다. 이번에 함께 시도된 <꽃>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17-18세기 네덜란드 정물화가 그랬듯 장식의 목적과 기원을 담은 염원의 표정으로 화려한 꽃 그림을 제시하며 하나하나에 꽃말의 상징과 뜻을 담아서 월 단위로 형상화했다. 현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담아서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새 모험은 어떤 성과를 거두게 될지 미지수다.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그 과정이 가지는 의미에 우선 더 크게 주목하고 싶다. 작가의 뛰어난 테크닉은 언제든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을 뒷받침 할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갖고서.

김 영 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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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파편화된 세계에서 말하기 등록일 : 2015-09-21    조회: 1465
작성자 : 이선영(미술평론가) 첨부파일:
Artists & Critics

파편화된 세계에서 말하기

미술평론가 이선영이 만난 작가

자동차라는 소재를 통해 돈과 예술이라는 주제를 표현한 윤상천의 작품 [pine tree - MONEY]와 [pine tree - ART] (2009년)는 갤러리의 윈도우 전면에 막 출시된 상품처럼 배치되어 있다. 부조처럼 일부분만 관객 또는 행인을 향해 머리를 디밀고 있지만, 새로운 얼굴을 알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자연광과 인공조명에 번쩍거리는 외관이 물신주의적 마력을 발산하는 그것들은 마치 벽과 유리를 뚫고 창밖으로 달려 나올 듯이 현실감이 있다. 이 한 쌍의 작품이 ‘예술은 상품이고 상품은 예술이다’는 식의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서는 것은 자동차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이다. 자동차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이었다. 헨리 포드가 ‘포드 시스템’이라고 알려진 바의 그 분업체계를 통해 부유층 뿐 아니라, 대량 생산 시스템의 부품이 되는 노동자들에게도 싼 값으로 자동차를 판매하려는 전략이 성공하는 순간에 더욱 그러했다. 윤상천의 작품은 진짜 자동차처럼 정교하지만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편이고 샘플이지만, 시스템을 배후에 깔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생산-소비의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기계 장치인 것이다.

실제로 달릴 수 없는 이모형은 자동차의 기표이다. 성공한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유력한 기표의 위치를 선점해야만 한다. 오늘날 자동차는 대중의 욕망하는 대표적인 기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예술작품도 이렇듯 다수가 열망하는 기표-상품이 될 수 있을까? 예술가도 예술이나 사회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자동차가 필요하며, 자동차 역시 당대의 미의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예술이 요구될 수 있지만, 예술과 산업 간의 교환이 공정하고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자동차로 대변되는 현대의 분업 시스템은 겉보기와 달리 합리적이지 않다. 분업은 공정한 교환이 아니라, 타자의 노동이라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수단(도구적 이성)이 되었다. 현대 사회는 자연과 달리, 차이를 차별로 작은 차이를 큰 차이로 벌려나가면서 독점이 구축되는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도 자동차처럼 물신적 체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다. 예술 역시 자동차처럼 겹겹이 구조화된 시스템을 통해 생산, 소비되는 대상의 하나이고, 그래서 체계의 구성원들은 이 물신화의 시스템에서 탈락되지 않으려고, 더 나아가 보다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한 전략에 몰두한다.

예술이 다른 상품과 다를 바 없는 체계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이를 통해 예술가도 최소한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고 생활할 수는 있지만, 시스템이라는 것이 하나를 용인하면 그다음의 타협을 요구하며, 그렇게 계속 욕망에 목이 마른 상태를 유지, 확대시킨다는 점에 질곡이 있다. 분명한 것은 성공이나 흥행에 반드시 필요한 물신적 체계라는 것이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를 만들어내는 독점적 구조이기에, 각자 다양한 언어로 다양한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과는 양립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소재로 한 윤상천의 또 다른 작품 [Pine tree art car](2011년)는 실제로 움직일 수 있다. 작가는 실제의 차 표면위에 반영된 솔숲의 모습을 자동차 도료를 이용하여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주변을 완전히 반사할 수 있도록 마감 처리하였다. 이렇게 튜닝 된 차로 대구의 서문시장을 지나가고 있는 장면은 갤러리 같은 추상적 공간보다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생산된 상품들이 모여들고 돈과 교환되는 북적거리는 시장판 한가운데에 있다. 주변세계를 복사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는 의태(擬態)적 생물체처럼, 그 거울 같은 차는 상품이 유통되는 세계를 반사한다. 상품의 세계 자체가 서로를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의 방 같은 구조를 이룬다. 복제에 기반 하는 생산시스템 뿐 아니라, 소비 역시 그러하다. 거울을 마주하듯이 서로의 소유물을 바라보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북돋을 수 있어야만 대량 생산소비 시스템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상천의 자동차 시리즈가 물신화의 정점에 있는 소비상품을 통해 현대사회의 구조를 언급하고 있다면, 회화는 보다 묵시론적이다. 거기에서는 파편들이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에 기반 하는 질서를 잃고 조각난 채 떠돈다. 이상적인 주행을 하는 자동차처럼 쭉 뻗은 길을 질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질주의 종착점에서 기다리는 것은 조화와 질서가 아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이에게 그 동안 간과되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때로는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도달하는 곳이 어디이든,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오직 하나로 뻗은 길로만 가야한다면 모순은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모순은 증폭되며, 증폭된 모순은 단지 은폐될 뿐이다. 윤상천의 복잡한 그림은 억압된 것들이 복귀하는 장이다. 운전자의 꿈은 잘 닦인 길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유토피아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처럼 뚫린 길은 이제 적체와 지체 현상을 반복하면서 발전지상주의적 환상의 허구성을 도처에서 드러낸다.

고속도로 같이 생긴 직선적 세계관에는 뭔가 종말론적인 것이 있다. 근대주의 이데올로기가 추동하는 발전과 진보가 사실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선의 끝, 그 결말은 파국적이다. 좀 나아봤자 파국을 타자들에게 전가함으로서 잠시 유예될 뿐이다. 많은 역사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근대의 역사주의는 종말론적 세계관과 상당부분 닮았다. 2013년에 발표된 윤상천의 회화작품은 제목부터가 매우 파편적이고 복잡하다. 작품 제목에는 작품의 내용을 이루는 도상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가령 [Com-Ele-Lab-Pol-Dis-Hop··· (소통, 선거, 노동, 정치, 장애, 희망 ···)], [Boo-Tee-Ani-Old-Lux ··· (책, 치아, 애니팡, 노인, 사치 ···)], [ Env-Nat-Pol-Ent-Var-Poi·· (환경, 자연, 오염, 입시, 변종, 중독)], [Fri-New-Rel-Mas-Uni-Fre···(친구, 신문, 통일, 종교, 대학살, 자유···/어깨동무)]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파편적이고 묵시록적인 이미지들의 배후에는 자동차로 상징되는 산업사회의 바통을 이어받은 정보고속도의 시대가 있다. 이전시대의 돈이 그 역할을 그렇게 수행했듯이, 모든 것이 코드화 된다. 그러나 코드화되지 못하는 것들은 자동차로 지나가면서 간과했던 그것들처럼 되돌아온다. 발전, 또는 진보를 향해 달려왔던 기나긴 직선의 시간감각은 점점 짧아지는 현재로 분절 화된다. 탈근대는 근대와 질적으로 다르기 보다는 가속도가 붙은 근대라고 봐야할 것이다. 정연한 인과논리에 의해 엮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수많은 도상-기표들이 쇄도하는 윤상천의 그림은 고속도로나 철도 같은 장대한 서사의 시대가 끝나고, 서사 자체를 형성할 수 있을 만한 시간감각이 결여된 비트의 시대를 반영한다.

무한 속도로 질주하는 정보화는 이동조차 필요 없는 영원한 현재의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주체가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은 여전히 서사이기 때문에,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각광받는다.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흥행몰이를 하는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에는 반드시 잘 조직화된 서사가 있다. 회화도 한때는 서사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둘러보지만, 더 의미화하기 어려워한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하기 힘들어진 시대에, 제각각의 욕망을 따라 사발팔방으로 떠도는 기표들을 어떻게 묶어내서 조직화할 것인가. 무의미의 우주와 변별되는 상징적 우주를 어떻게 다시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화가는 자신이 벙어리인지도 모르는 대중을 대신하여 냉가슴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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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윤상천의 'Reflected pine-trees'展에 부쳐 등록일 : 2015-05-12    조회: 1903
작성자 : 김태복(예술박사,교수 첨부파일:
윤상천의 'Reflected pine-trees'展에 부쳐

미스매칭(mismatching)
왕유(王維)의 그림 중에 봄에 피는 자두꽃과 가을에 피는 국화꽃이 함께 그려진 그림이 있다. 그것은 왕유가 계절을 착각한 것이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상을 한 화폭에 담아 새로운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는 시가 있다고 칭송하였다.
비오는 날 비를 맞는 아기 산솔새들과 어미 산솔새. 가림막 없는 둥지와 그 빗속을 어미새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다. 윤상천은 소나무 위에서 살지 않는 산솔새를 소나무와 함께 그려 소나무 그림에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싶어 한다.

‘인간의 활동인 회화가 사회의 여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하버트 리이드(Habert Read)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시대의 작가들에게 미술은 사회활동이고 경험과 기억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넋두리 같은 짧은 글들 속에는 예술가로서 숙명과도 같은 현실과의 괴리감에 대한 갈등들이 나타나고 있다. 늘 그러한 갈등 속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작업과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그러한 갈등은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소나무라는 전통적인 자연소재와 문명의 이기의 상징체로서 금속성의 자동차 보닛(bonnet)이라는 이질적 요소들을 미스매칭(mismatching)시킨 그의 작품들은 어쩌면 태생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하고 있는 우리의 환경(예술가로서 예술적 환경은 말할 것도 없이) 즉, 정치적 불안정과 흑백논리, 산업화에 따른 지역간의 문화적 차이 등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불혹을 넘긴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그린 동세대의 자화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삶과 현실의 메타포(metaphor), 소나무와 보닛(bonnet)
작가는 2년 전부터 전통적인 타블로에서 탈피하여 ‘금속성의 자동차 보닛위에 소나무가 투영된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에게 있어 자연소재인 소나무는 ‘지나온 삶(과거 또는 전통)의 상징체’로서, 보닛은 ‘문명의 이기(현실 또는 현대)의 상징체’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작업은 여러 가지의 소재와 다양한 기법들의 실험의 시기를 지나 2회 개인전 부터는 소나무를 테마로 한 타블로에 천착(穿鑿)하였고 작가로서의 역량도 어느 정도 평가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스스로가 우리 화단(畵壇)에 팽배한 소재주의를 경계하며 타성과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회 개인전부터 ‘반영된 소나무’를 테마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번 전시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타블로를 비롯하여 자동차의 부품들을 오브제 또는 지지체로 활용한 20여점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된다. 특히, 자동차의 실제감과 반사체의 구조까지 고려하여 스스로 디자인하고 제작한 후드그릴(자동차의 전면부)의 표면에 투영된 솔숲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 'PINE TREE-ART'는 작가의 열정과 치밀한 작업 프로세스를 엿보게 한다.

오브제와 이미지의 오버랩(overlap)
작가의 최근의 작업에서 보이는 조형적 특징은 지지체의 이미지 위에 또 다른 이미지를 중첩하는 표현기법이 일관되고 있다. 보닛이라는 그 자체가 가진 조형미에 주목하면서 지난(至難)한 지지체의 작업과정(이 과정에서 일상적이고 현대적인 재료에 대한 연구도 치열하다)을 거쳐 평면적 이미지를 오버랩(overlap)하고 있다. 보닛이라는 금속성 반사체에 소나무의 형상이 오버랩되고 다시 그 이미지 위에 오브제가 얹혀져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극사실기법으로 또 다른 사물들이 얹혀져 있다. 즉, 오브제로서의 보닛과 회화로서의 소나무의 이미지, 그 둘을 하나의 이미지로 융합시켜주는 극사실기법의 사물을 다시 한번 더 중첩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버랩 된 이미지 속에 다시 실루엣 드로잉과 같은 기억 속의 편린과도 같은 이미지들을 그려 넣거나 소나무 형상의 거울 조각을 콜라지하여 관객들 스스로가 실루엣 드로잉의 주인공이 되거나 작품 속의 일부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세심함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작가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중첩’은 전통적인 일루젼(perspective)을 위한 ‘사물의 중첩’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중첩은 대상의 일부분들을 제거하는 속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대상들을 시각적으로 통합하는 속성을 가진다. 반면, 복수의 ‘이미지의 중첩’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중복처리 되기 때문에 사물들의 물리적인 완전성을 함께 표현함에 있어 그만큼 어려운 표현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사진에서는 오버랩, 영상예술에서는 디졸브(dissolve)라 한다. 미술에서도 이와 비슷한 초현실주의자들의 데페이즈망이 있다. 작가는 시공간의 밀접한 관련을 암시하는 디졸브와 같은 영상기법을 차용하여 보닛과 소나무로 상징되는 상호 명료한 이질적 소재들의 부조화를 부드럽게 융화시키고 있다. 또한 보닛의 굴절에 따른 형상의 왜곡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보닛과 소나무라는 개별성을 약화시키는 대신 입체감과 이질적 이미지의 일체감을 견고하게 하여 조형적 완결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미 소나무 작가로서 역량을 평가 받고 있지만 그가 새롭게 시도하는 최근의 작업들은 조형적 형식미를 강조하면서 그가 의도하였던 아니든 그동안 천착하던 소나무의 아우라는 최소한 보닛작품에서는 점차 약해지고 있는 듯하다. 이점이 그의 작업에서 좋고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볼 때 또 다른 변화를 위한 모색의 과정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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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동차 보닛 위에 반영된 소나무의 영성(靈性) 등록일 : 2015-03-05    조회: 2036
작성자 : 장미진(미술평론가) 첨부파일:
1. 소나무의 말씀(木言)

윤상천은 ‘소나무 작가’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동안 주로 소나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투영해 왔다. 소나무는 동양철학에서 인간 삶과의 유비 가운데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는 나무로 칭송되었고, 현금에도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여기며 또한 경원해마지 않는 자연소재이다. ‘자연의 인간화’를 표방했던 유가 전통에서나 ‘인간의 자연화’를 구가했던 도가 철학, 혹은 불이(不二)철학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는 불가사상 속에도 소나무는 우주적 시공간을 상징하는 영물(靈物)로 비유되어 왔다. 그런 만큼 소나무는 고금의 예술 소재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누가 있어 실로 소나무를 다 그렸다 할 수 있을까. 소나무와 정자, 소나무와 십장생, 소나무와 산수화, 소나무와 우주, 그리고 ‘소나무 만다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소나무를 그리고 읊었지만, 기실 소나무는 여전히 새롭게 그려질 수 있는 날것의 영적인 소재로 남아 있다.
역시 소나무는 자라는 토양에 따라 ‘자연이 주는 디자인’으로 우주적인 다양한 내재율을 품어내고 있다. 아마도 지리산 근처 천년송을 끌어안아 본 사람이라면 천지간의 호흡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소나무의 기운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솔바람 모임’이 있을 정도로 소나무의 법문, 소나무의 ‘말씀’은
동호회를 통해서도 민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2. 모티브로서의 소나무

작가는 <1980년대 이후 회화에 나타난 소나무의 상징성과 조형성>이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쓸 정도로 소나무에 대하여 심도 있게 연구하였고, 전국의 소나무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기운을 옮기려 매진해 왔다.
이 작가에게 있어 소나무는 작품의 소재이면서 표현의 주 모티브이고, 또한 예술 매체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 다양하듯이 작가의 화의(畵意)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말한다: “한국사람은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고 할 정도로 소나무는 예로부터 우리의 생활에 물질적,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소나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소나무를 통하여 전통과 현대의 맥을, 그리고 민족의 정서와 개인의 감성적 유대감을 투영하고 환기시킴으로써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 우리는 소나무에서 성장의 리듬과 연륜을 지각할 수 있는 선과 기운을 느낄 수 있고, 면면히 내려오는 역사의 기운과 땅과 하늘의 소통을 통한 생명력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작가의 예술의지가 구현된 것이 그의 소나무 그림들이다. 청도의 <처진 소나무>를 비롯하여 안동과 봉화의 적송들과 춘양의 금강송, 흥해의 솔숲과 태백의 솔숲 등, 한 두 그루의 소나무에서부터 3미터가 넘는 파노라마의 솔숲 표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지역과 자생지에 따라 기운이 다른 각양각색의 소나무들을 꾸준히 그려왔다. 한 가지 소재에 천착했던 만큼 표현의 기량도 연마되어, 붉은 살가죽이 세월의 질감을 전하는 소나무의 줄기와 청청한 솔잎의 초록빛이 햇빛에 빛나는 그림들은 소나무의 기운생동 함을 투영하고 있다. 다양한 양식과 매체표현이 난무하는 현대미술의 와중에서 2007년 ‘올해의 청년작가전’(문화회관 기획)에 열 명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초대 개인전이 열렸던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만하다. 그만큼 화가로서의 지구력과 진정성이 어느 정도 평가되었던 결과였다.
그런데 그동안 주로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작업해오던 작가가 이번에는 자동차 보닛(bonnet) 위에 소나무 그리기를 시도한다. 현대문명의 이기로서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금속성의 자동차들, 현대 삶의 속도감과 건조함을 대변하는 자동차의 한 부분인 보닛 강철판을 이용하여 그 위에 소나무를 그린다.

3. 반영된 소나무와 영성

대자연은 여전히 법문을 굴리고 있어도 현대인들은 그 자연의 말씀을 여유 있게 경청하지 못한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그냥 스쳐 지나칠 뿐이다. 그 보닛 위에 스쳐 지나가는 소나무의 실루엣들과 때로는 세워 둔 자동차에 비치는 소나무들에 작가는 주목한다. 형체가 왜곡되면서도 공기와 빛 속에 소나무들이 품어내는 선과 색채가 오묘하게 반영된다. ‘반영된 소나무’는 단지 보닛 위에 비치는 것을 묘사 했다기 보다는 현대인의 심상 속에 잃어버린 나무의 기운을 환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반영된 나무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렇게라도 대자연의 내재율과 소나무의 영성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보닛은 강철로 된 변형 캔버스이다. 이전에 그는 평면위에 부조적인 마티에르 효과를 위해 유화물감을 두텁게 칠하고 나이프 작업을 병행하기도 하였고, 또는 도마나 문 위에 소나무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보닛 강철판을 연마하고 여러 공정을 거쳐 화면을 다듬은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또 다른 효과를 도모하고 있다. 다양한 색의 소형차 보닛을 폐차장이나 정비공장 등에서 구해 에어 컴프레서와 원형샌더기를 이용하여 도색 안료를 베껴내고, 캔졸(consol)을 페트롤(petrole)로 희석하여 밑칠을 두세겹 칠한 다음,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때로 전동 조각칼인 핸드피스(handpiece)를 사용해 하늘의 태양빛 반사 효과나 소나무 껍질의 양감을 살리기도 하고, 보닛의 광택효과를 위해 유화물감 위에 바니쉬(varnish)를 발라 마무리를 하는 여러 공정을 거쳐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거의 중노동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작과정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수공과 시간을 드려야 하는 보닛 회화는 그가 얼마나 집요하게 소나무의 아우라를 현대의 감각으로 투영해내고자 고심하는지를 엿보게 한다.
‘소나무 만다라’(박희진 시집)라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소나무의 둥치와 가지, 잎들이 품고 있는 세계는 또 하나의 소우주이고, 그러한 풍경을 완상하며 음미하는 것 자체가 자아와 세계의 소통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번 작업에서는 현대적 삶 속에 반영된 풍경, 즉 형태가 왜곡되거나 흐릿한 이미지로 추상화되고 해체되는 전이과정을 드러내면서 현대인의 심상 속에 번안된 소나무들이 선보이고 있다. 또한 작가는 노동의 프로세스를 통해 한 그루 소나무가 품고 있는 시 공간의 무게에 접근해가는 묘미도 느끼는 듯하다. 이번에 전시되는 20여점의 작품 중에 9점은 베니어합판을 보닛 모양으로 가공하여 만든 작품들이다. 금속성과 나무의 질감 차이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이 소나무가 지니는 상징성과 수공의 효과를 앞으로 얼마만큼 아우르게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소나무를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작위적으로 만들어 투사하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소나무의 형상(eidos)과 본질을 오히려 직관적인 형식으로 대면케 할 수 있는 사유와 창조적 장치가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자극과 발전을 위해서 이번 전시는 그의 화력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리라 여겨진다.
‘포스코 스틸아트’를 위해 구상한 작품 중에는 보닛 위에 화재로 무너져가는 숭례문과 소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 공간을 뚫어 모니터를 장치하고, 영상과 소리 등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의도의 작업 구상도 있다. 앞으로 어떻게 구체화되어 갈지는 지켜보아야겠지만, 자동차 전체를 갤러리 공간 안에 가져다 보닛 뿐 아니라 창유리나 트렁크, 차 지붕 등에 반영된 소나무를 그리고, 벽면에 그린 소나무 숲과 함께 솔바람 소리 등의 소리와 영상이 가세하는 현장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묘사력이 뛰어난 만큼 그러한 묘사력을 살리면서도 소나무의 영성을 드러내기 위해 현대미술의 다양한 창조 전략들을 활용한다면 앞으로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작업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장미진(미술평론가, 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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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소나무 화가 尹相千 등록일 : 2015-02-21    조회: 2051
작성자 : 朴喜璡(시인, 예술원) 첨부파일:
윤상천은 많은 공모전, 또는 단체전에 출품해왔지만 개인전도 이번이 네 번째나 된다. 놀라운 것은 제1회 개인전(2002)을 제외한 세 번의 개인전이 온통 소나무 그림들로 메워져 있다는 것! 아직 40미만의 젊은 화가인데 그렇듯 소나무에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을 쏟아오고 있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의 출생지가 신라 천년의 유서 깊은 고도인 경주라는 점, - 주지의 사실이듯 경주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수승한 소나무 고장이다 - 또한 그의 석사 학위 논문이 「1980년대 이후 회화에 나타난 소나무의 상징성과 조형성」이란 점을 감안할 때 그는 어쩌면 운명적으로 소나무 화가의 길을 점지 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이면 설사 소나무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이순(耳順)은 넘어야 소나무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그런데 홀연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윤상천의 소나무 사랑은 너무도 각별하다. 신통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개인전의 카탈로그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면 누구나 나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감해 줄 것이다. 한두 그루의 소나무를 그렸건 혹은 수십 그루가 어울려 있는 솔숲을 그렸건 그의 화면 구성에는 무리가 없다.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고 있다. 젊은 화가의 솜씨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달한 필세와 노련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김없이 소나무 특유의 분위기를 일단은 성공적으로 자아내고 있음이 감지된다. 바로 그 점이 내게는 각별하게 놀라운 것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 이 젊은 화가에겐 뛰어난 재능뿐만이 아니라 플러스알파가 주어져 있구나! 아직은 그 알파가 무엇인지 화가 자신도 모르고 있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수십년을 추구해야, 도를 닦듯 화두를 참구하듯 온몸온맘으로 갈고 닦아야 비로소 그 정체성을 드러내게 될 줄 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을 사진으로나마 살펴보니 그동안 그에겐 몇 가지 달라진 모습이랄까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는 소나무를 바라보는 위치가 달라져 있다. 지금까지의 소나무들은 대체로 거리를 두고 멀리 관망한 모습인데 비해서 이번의 그것들은 훨씬 앞으로 다가선 위치에서 관찰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대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 본질을 탐색하고 파악해보려는 의욕과 의지의 발로라 여겨진다. 소나무의 기운생동, 그것은 이렇게도 즉 전체상을 그리지 않더라도 드러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는 묻고 있는 듯하다.
전의 그림들에서보다 소나무 껍질이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그려진 모습에서, 또는 풀밭에 어려 있는 소나무 그림자의 신비롭고도 미묘한 색조를 좀 더 실감나게 그려보려 한 점에서, 또는 원근법의 효과적 활용으로 솔밭 전체의 거의 무한히 이어져 있는 듯한 안으로의 깊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거나 어떤 색다른 배경과의 대비를 통해 그 주변 일대의 광활한 공간감을 역학적으로 자아낸 점 등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가 확인된다. 한편 무엇보다도 이번의 작품들은 200호를 포함하는 대작들인 만큼 그 큰 화폭을 빈틈없이 메운 솔숲의 박진감은 가위 압도적일 것이라 짐작된다. (실물을 보지 않고 내가 이런 소리 하는 걸 과히 나무라지 마시압)
소나무는 참으로 묘한 나무이다. 밑동에서 우듬지까지 소나무의 전체상을 그리지 않더라도, 가령 솔방울 몇 개, 또는 거두절미한 줄기의 모양새, 또는 솔가지 하나라도 잘만 그린다면 능히 소나무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소나무는 유난히 그 가지뻗음새나 빛깔이 다양하고 뿌리 내린 장소와 시간대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동일한 소나무도 천자만태로 비치게 된다. 소나무는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는 나무,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는 나무,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나무, 한마디로 기(氣) 덩어리, 무궁무진 신묘(神妙)한 나무인 것이다. 이러한 소나무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다는 건 어떤 화가에게나 벅찬 일이지만, 목숨을 걸고 추구해 볼 만한 매력적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소나무 추구의 대장정(大長征) 길로 이미 깊숙이 들어선 윤상천은 앞으로도 닥쳐올 갖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유종의 미(美)를 거둘 수 있도록 늘 자기혁신의 정진을 지속하여 줄 것을 당부한다.
일반적으로 소나무 그림이란 동양화 즉 한국화라야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서양화로서도 그 장점을 활용할진대 기똥찬 소나무를 그릴 수 있을 터, 아니 오히려 서양화가 아니고선 표현할 길이 없는 신생면이 능히 개척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소나무의 기운생동, 그것이 얼마든지 유화로서도 표현될 수 있다면 동서의 융합은 회화세계에서도 가능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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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다양한 소나무 그림(작업)에 감동했습니다. 등록일 : 2014-03-26    조회: 2520
작성자 : 연리지 첨부파일:
소나무 그림을 좋아해서 우연하게 윤작가님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소나무 관련 작업에 많이 놀라고 감동받았습니다.
최근에 변화된 작업들도 신선한 느낌입니다.
일취월장 하시고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시길 기원합니다.
가끔 방문해서 발전하시는 모습 지켜보겠습니다. (대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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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작업사진보니깐~ 등록일 : 2011-08-10    조회: 3718
작성자 : 홍종기 첨부파일:
정말 고생하고 계시는군요 ㅜㅜ

근데 굉장히 멋지네요!!!!

실제 보고 싶습니다~ 대구는 걱정마시고~ 작품사진 많이 올려주세요~ 많이 궁금하답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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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경 400살 천연기념물松 등록일 : 2011-07-01    조회: 3844
작성자 : 문경맨 첨부파일:
일부 가지가 부러진 채 고사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문경 천연기념물 426호 대하리 소나무가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426호로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 있는 수령 400여 년의 소나무가 말라 죽어가고 있어 주민들이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땅에서부터 여러 갈래의 줄기로 갈라지는 반송(盤松) 형태인 이 소나무는 지난 200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관리 되고 있으나 최근 들어 하단부의 일부 줄기부터 마르는 고사현상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가지가 부러진 채 땅바닥을 향하고 있으며 잎과 줄기 색깔이 누렇게 변하고 나뭇가지가 탄력을 잃고 있어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의 아름다운 자태를 잃어가고 있다.

주민들은 "이 소나무의 매력은 줄기와 가지의 조화 속에 나타나는 용틀임 형상인데, 지금의 모습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면서 "당국이 철저한 원인조사와 외과수술 등 보호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과 문경시는 "그동안 생육촉진과 수세회복을 위한 영양제 투입, 병해충 방제 등 보존관리를 해왔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있다"면서 "수령이 오래 되면서 고사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썩은 부위를 잘라내는 등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문경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를 3그루나 보유하고 있었으나 2006년 425호 존도리 소나무가 완전 고사해 현재는 292호인 농암면 소나무와 대하리 소나무만 남아 있다.

문경`고도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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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눈 폭탄에 부러진 아름드리 소나무 등록일 : 2011-02-17    조회: 4125
작성자 : 연합뉴스 첨부파일:
동해안에 쏟아진 눈 폭탄으로 13일 강원 강릉시 경포호 인근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맥없이 부러져 있다. 이번 폭설은 무거운 습설이어서 많은 설해목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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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속리산 정이품송 큰 가지 또 부러져 등록일 : 2010-12-07    조회: 4538
작성자 : 보은연합뉴스 박병기 첨부파일:
2010년12월7일 오전 10시께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천연기념물 103호인 정이품송 큰 가지 1개가 부러져 있는 것을 주민 김모(50)씨가 발견, 보은군에 신고했다.
김씨는 "정이품송 옆을 지나는 데 서쪽(하천쪽) 가지 1개가 부러진 채 매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부러진 가지는 지름 20㎝, 길이 4m 가량으로 몸통서 뻗어 나와 두갈래로 자란 가지 중 하나다.

보은군청 정유훈(37) 학예연구사는 "부러진 가지는 3년 전 강풍에 부러진 가지 바로 옆의 것으로 바람이 센 서쪽 방향에 노출돼 그동안 여러 차례 강풍과 폭설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보은군은 정이품송을 관리하는 현대나무병원에 의뢰해 부러진 가지를 잘라낸 뒤 몸통이 썩지 않도록 방부처리하고 다른 가지도 바람피해를 덜 받도록 동여맸다. 높이 16m, 둘레(지상 1m) 4.7m인 정이품송은 1993년과 2007년 강풍에 직경 25㎝ 안팎의 큰 가지 2개를 잃고 좌우대칭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1980년대 중부지방을 강타한 솔잎혹파리에 감염돼 수세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한 정이품송은 1993년 동북쪽 큰 가지(지름 30㎝)를 강풍에 잃고 5년 뒤 바로 옆의 또 다른 가지(지름 20㎝)가 말라죽으면서 고고하던 원추형 자태를 잃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잇따른 강풍과 폭설피해로 지름 15㎝의 중간 가지 1개와 잔가지 여러 개를 잃었고, 2007년 서쪽방향 큰 가지가 돌풍에 부러지면서 대칭을 이루던 좌우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문화재청과 보은군은 이 나무를 살리기 위해 주치의(나무병원)를 지정해 주기적으로 건강상태를 살피는 한편 상처 난 부위에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인공수피를 씌우는 외과수술도 병행했다.

또 뿌리건강을 해치는 원인으로 지적되던 밑동주변 복토층에 유공관(지름 10㎝ 안팎의 플라스틱 원형관)을 묻어 뿌리호흡을 돕고 배수로도 설치했다.

40여년째 이 나무를 관리하는 박헌(82)씨는 "솔잎혹파리에 감염돼 죽을 고비를 넘긴 정이품송이 노쇠한 기력을 회복하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몇개 남지 않은 큰 가지를 또다시 잃으면서 고고하던 수형이 완전히 망가져 보기에도 민망하다"고 말했다.

높이 16m, 가슴높이 둘레(지상 1m) 4.7m인 이 나무는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의 속리산 행차 때 어가(御駕)행렬이 무사히 통과하도록 가지를 스스로 들어올려 정이품 벼슬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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